나는 홍상수가 싫다.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홍상수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최근작까지 그의 영화를 빼먹어 본 기억은 없다. (<자유의 언덕>은 아직 보지 못했다.) 또한 홍상수의 영화를 누군가와 같이 본 기억도 없다. 대체로 나는 그의 영화를 극장이건 DVD건 혼자서 봐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와 함께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내 찌질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연애의 옛 날들을 타인과 함께 다시 기억하면서 지켜본다는 것이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의 영화보기를 중단하지도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마초가 거세된 남성들에게 남는 것은 욕망의 찌질함 뿐이다. 

내가 읽는 홍상수의 영화는 ‘신파’다. 홍상수의 모든 작품은 <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이다. 순수 청년 이수일과, 노련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김중배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썸을 타는 여주인공 심순애의 삼각관계로 구성된 <장한몽>의 세계관을 홍상수는 그의 모든 영화에서 차용한다. 그는 단지 이 세 명의 인물을 조금 비틀 뿐이다. 이수일에게는 순정을 덜어낸 후 성적 욕망을 채운다. 김중배가 가진 물질적 부유함은 홍상수를 만나면서 지적 부유함으로 바뀌며,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던 피동적 여주인공 심순애는 쿨하고 냉소적인 전지적 여신으로 성형되어진다. 그래서 홍상수는 여성을 숭배하는 철저한 패미니스트다. (그는 무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라는 선언까지 했다.) 그의 영화에서 주동인물은 언제나 심순애이며 ?그녀 앞에서, 그녀 앞에서만은? 남자들의 마초성은 철저하게 거세된다. 마초가 거세된 남성들에게 남는 것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겨대는 찌질한 정욕 뿐이다. 이수일의 찌질함은 나이를 먹어봤자 결코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고 겨우 ‘나이 먹은 이수일’인 김중배가 될 뿐이다.
따라서 김중배 또한 노련함으로 마음속 불꽃을 숨기려고 노력해보지만, 심순애를 만나는 순간엔 결국 다시 찌질한 청년 이수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홍상수의 일관된 스토리다. 찌질한 욕망 정도로는 여신 심순애를 얻을 수 없기에 홍상수 러브스토리는 언제나 남성들의 비극으로 끝난다. 심순애는 애당초 이런 부족한 사내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기에 이수일과 김중배는 결코 그녀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심순애는 결국 어디론가 떠난다. 이수일과 김중배에게는, 함부로 심순애에게 해버린 철없는 고백과 애당초 지킬 수 없었던 약속들이 부끄러운 기억이 되어 남을 뿐이다.

 
 

어느 청춘에도 신파의 시퀀스는 존재한다.

어느 청춘에도 이런 신파의 시퀀스는 존재한다. 이 부끄러운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다.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었던 그 순간을 홍상수는 다시 끄집어내며 나의 추억을 헤집고 헝클어뜨린다. 잊을 만하면 제목만 바꾼 영화를 하나씩 보여주면서 ‘헤이. 그 추억을 꼭 잊을 필요가 있을까? 미숙했고, 처음부터 거짓말일수 밖엔 없었지만 확실히 그 또한 너의 청춘의 한 순간이었잖아?’ 라고 홍상수의 영화는 고약하게도 묻는다. 나는 홍상수가 싫다.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어서 ? 나는. 홍상수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