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었고, 언제나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폴랜드’와 ‘폴 랜드’는 엄연하게 다르다. 띄어쓰기를 잘해야 한다. 폴랜드(Poland)는 레흐 바웬사를 배출했고, 중부 유럽 발트 해 연안에 있으며, 2002년에 우리나라에 월드컵 첫 승을 안겨준 기특한 나라다. 그리고 폴 랜드(Paul Rand)는 20세기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와 같은 무게를 가진 ‘제왕의 이름’이다. 우리가 조용필의 음악 장르를 록(rock)인지, 발라드인지, 트로트인지를 간단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그냥 그를 ‘가왕’이라고 칭하듯, 폴 랜드의 크리에이티브 역시 한 마디, 한 영역으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다.

모든 천재가 조숙한 청춘을 보냈듯이 폴 랜드 역시 고작 23살 때 『에스콰이어』지의 아트디렉터로 화려하게 등장한다. 1930년대 폴 랜드는 바우하우스의 합리성을 기초로 단순하지만 정교한 모더니즘을 편집 디자인에 적용하며 ‘미국적 그래픽’을 정의한다. 1940년대는 뉴욕의 광고대행사인 바인트라우베(Weintraub)에서 New Advertising 운동을 선도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변신한다. 폴 랜드는 ‘잘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던 이전까지의 디자인 개념을 ‘잘 이해시키는 것’으로 바꾸며 Concept라는 단어를 그래픽보다 상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1950년대, 잡지를 편집하고 광고를 만들던 폴 랜드의 디자인은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통합하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가 지금으로부터 60년도 이전에 만든 IBM, ABC방송국, UPS, 웨스팅하우스의 로고는 아직까지도 원형을 잃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서 폴 랜드는 ‘기업 디자인의 대부’ (이런 어색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기업디자인의 대부 폴 랜드』라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로 우뚝 선다. 조용필에 빗대어 말하자면 이제 폴 랜드는 ‘디왕 - 디자인의 왕’이 된다.

 
 

디왕 - 폴 랜드를 경배하라

1960년대부터 디자이너로서 ‘다 이루었다.’를 증명한 폴 랜드는 예일대학교에서 디자인을 강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1996년까지 30여 년간 폴 랜드에게 교육과 영감의 세례를 받은 무수한 디자이너와 아트 디렉터들이 등장한다. 편집 디자이너로, 광고 디렉터로, 기업과 브랜드 마케터로, 그리고 선생으로서 -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의 인생으로 - 폴 랜드는 디자인을 했고, 디자인을 진화시켰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스스로 ‘편집 디자이너, 웹 디자이너, 웹 기획자, 카피라이터, AE’ 같은 타이틀 속에 가둔다면, 혹은 현업 디자이너와 대학교수로 구분한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폴 랜드가 폐기한 개념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1986년에 만든 회사인 Next컴퓨터의 로고도 폴 랜드의 작품이다. 그때 폴 랜드의 나이는 73세였다.)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거나 좋아하는 디자이너를 말해보라고 했을 때, 조나단 아이브나 하랴 켄야 혹은 디터람스를 많이들 말한다. 폴 랜드라고 대답하는 젊은 디자이너는 많지 않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 성시경을 좋아해도, 걸 그룹을 좋아해도 혹은 서태지를 좋아해도 그 맨 꼭대기에 조용필이라는 가왕이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폴 랜드는 그 가치- 디왕의 수준에서 담아두어야 하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