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우리는 얼마나 경박한가?’

7~8년쯤 전 ‘오마이뉴스’의 의뢰를 받고 <서희>라는 장편소설을 연재한 적이 있다. 고려시대 실존했던 인물이자,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교관이었던 서희[徐熙, 942~998]를 다시 해석해보자는 원고지 8,000매 정도의 큰 기획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1,500매 정도 쓰다가 연재를 중단한 이후, 아직 이어가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언젠가는 다시 쓸 것이긴 하다.)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는 우리가 가진 경박함에 대한 반성 때문이었다.
나는 군사정권 시절에 서희라는 인물을 ‘세 치의 혀’라는 단어와 함께 배웠다. 그가 가진 놀라운 언변 덕분에 고려는 강동 6주를 얻게 되었다고 배웠다. 잘 생각해보자. 얼마나 싸가지 없는 후손들인가? 어쩌면 서희는 온몸을 바쳐 조국을 지켜낸 이순신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보다 더 위대한 조상이다. 그분이 가진 능력 덕분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는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고조선부터 역사책을 돋보기로 찬찬히 읽어봐도, 우리 조상 중에 이런 위대한 분은 흔치 않다. 그런데 그 위대한 업적이 ‘세 치의 혀’라니? 우리가 그렇게 배우고 말한 이유는 일제의 식민지사관 때문이긴 하지만 이런 경박함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경박함을 반복한다.

 
 

앙드레 김. 단언컨대 위대한 브랜드였다.

‘앙드레 김’의 경우가 그렇다. 단언컨데 그는 선구자였고, 위대한 브랜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였고, 파리에서 자기 이름으로 패션쇼를 개최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무려 50여 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그가 있었고, 앞서서 활동했기 때문에 뒤따라 많은 디자이너가 등장할 수 있었으며 패션산업은 수직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통문양과 순백주의라는 바탕 위에서 여성들의 우아함을 극대화한 그의 작품들이 다카다 겐조나 이세이 미야키, 이브 생 로랑과 견줄만하지 못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결국 앙드레 김을 이세이 미야키로 만들지 못했다. 되려 우리가 가진 경박함은 그가 평생 애써 만든 ‘앙드레 김’이라는 소중한 브랜드를 하루아침에 ‘김봉남’이라는 조롱거리로 발가벗겼다. 이제 앙드레 김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겨울만 되면 세상은 그의 디자인처럼 하얗게 변한다. 우리는 앙드레 김을 인정하지 못했고, 지켜주지 못했다. 더 크게 만들어주기는커녕 철없이 조롱했다. 나쁜 것은 우리다. 그리고 너무 늦긴 했지만, 더 나빠지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한다. “미안합니다. 앙드레 김 선생님.”


*사진출처: 앙드레김 웹사이트